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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리뷰]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kkiihhii 2019. 5. 12. 19:51

어쩌다 보니 산후조리원에서 심심해졌다. TV를 즐겨보는 스타일도 아니고 오로지 폰인생이라 뭘하면 좋을까 하다가 오디오 앱을 켰다. 자주 찾던 네이버 오디오클립은 이상하게 재생중간에 자꾸 끊긴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앱에서 뭘 들어볼까 하다가 오디오 랭킹에 10위안에는 항상 있던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을 듣게 되었다.

현재는 12화까지 들은 상태이고, 중간중간 누워서 듣다가 잠들어버린 편도 몇개 있어서 완벽하게 청취했다고 자신있게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기억에 남는것은 첫 1화에 김영하 작가님의 목소리로 들려주던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는 진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일단 중년 남성의 깊은 목소리가 한몫을 톡톡히 했거니와 조근조근 작품설명에 신중을 기하는 김영하 작가님의 소개말은 넋을 잃고 듣기에는 충분했다. 평소 지적인 남성에 대한 강한 로망이 있는 나에게 이것은 목소리 이상형인 성시경, 이동진의 계보를 잇는 또 하나의 목소리 이상형의 탄생을 의미했다.

솔직히 소개말을 들을때 까지도 중저음의 일반 남성 목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금각사의 본문을 읽기 시작하면서 미시마 유키오로 갑자기 변해버린 김영하 작가가 사뭇 달라보였다. 생각해봤다. 평생 살면서 중년의 남자가 내 귓가에 책을 읽어준 적이 있던가.

중학교 시절에 학급에 날짜순이나 그날 그날 기분따라 선생님이 번호를 불러 책상에서 일으켜 세워 국어책을 읽어보게 시킨 기억이 잠깐 스친다. 그러나 남자인 국어선생님이 읽는다고 해서 이런 울림을 느껴본적은 없었는데 ... 조금 더 생각해본다. 초등학교 5학년때의 남자 담임선생님이 (아마도 이름이 김진환 선생님이셨던것 같다.) 통기타를 들고 노랫말이 적힌 프린터물을 나눠주고 노래를 부를때 느낀 요상꼬리한 감정과 엇비슷하다.

물론 그가 내 스타일이라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꽤 덩치가 있었지만 내가 제일 싫어하는 턱수염을 짧게 기르고 계셨다. 당시에 나는 안경낀 남자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도 역시 성인이지만 예외는 없었다. 아무튼 초등학교 5학년 이후로 느껴본적 없던 중년 남성의 목소리에 엄청나게 빠져드는 경험을 해버렸다.

갑자기 들어본적도 없던 금각사라는 소설이 엄청난 역작처럼 다가온다. 동굴같은 김영하 소설가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가 해주는 이야기에 빠져든다. 머릿속에 본적도 없는 주인공의 얼굴이 대충 그려진다. 아주 찌질남일꺼야...하는 생각도 얼핏 스치지만 그런 잡생각은 그 다음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1화가 끝나있었다. 2화도 또 금각사다. 또 정신없이 들었다. 맙소사.

김영하 작가가 내 모닝콜을 해줬으면 좋겠다. 좀 생각해보자. 이동진이 비싼지 김영하가 비싼지. 성시경은 너무 비쌀거 같은데? 큰일이네. 누가 만나보라고 하면 한사코 거절하겠지만 목소리팬으로써 그가 죽는날까지 오디오로 소설을 읽어주면 정말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는 왜 67화에서 연재를 멈췄을까. 이 오디오를 끝내고 알쓸신잡에도 출현했다는 블로그글도 보고 말았다.

나는 그런 지적인 예능에 관심이 없는데 김영하 작가님 때문에 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혹시 거기서 그분이 금각사를 또 읽은거 아닌가? 하는 이상한 설레임도 있다. 김영하 선생님이 따로 금각사 한권을 다 읽어주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오디오북 같은건 소장하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그가 읽어주는 금각사라면 5만원이라도 결제할 의향이 있다.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랜만에 흥미진진하게 오디오를 듣고 있다. 며칠째 틈틈히 듣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추천하자면 그가 적은 단편소설을 읽은 11화 "악어"는 밥먹으며 즐겁게 들었다.

<<스포가 있으니 소설을 볼 사람은 뒤로 가세요.>>

왜 굳이 악어를 등장시켜야 했는지 생각해봤는데 오디오 마지막쯤에 구체적인 작가의 설명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악어의 임팩트가 모자라보인다. 내가 작가였다면 악어를 좀 더 잔인한 용도로 썼을 것이다. 소설속 마지막 장면에서 악어가 박제된 상태로 박물관에서 노래를 전하는 장면은 솔직히 크게 임팩트가 없다. 나라면 이렇게 쓴다.

악어의 눈물도 좀 넣어주고, 악어새도 넣어서 주인공과 여친도 같이 죽는 내용을 넣었다면 좀 더 강하게 기억에 남지 않았을까? 글고 초반부에 등장하던 엄마의 역활이 중반부에서 부터 없던데 엄마도 가끔씩 등장시켜줘서 주인공이 악어로 변해버리고 구슬피 우는 씬도 하나 넣어주면 참 좋았을 것 같다. 그리고 보너스로 갑자기 증발해버린 천재 아티스트의 행방을 쫓는 기사내용도 몇 개 정도 실어주면 재밌었을 것이다.

하긴. 저런 뻔한 내용들을 넣지 않고 담백하게 쓴 소설이기에 재밌었을 것이다. 아무튼 방안에만 갇혀있다고 잠만 자기보다는 어떻게든 조금씩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중이다. 글도 쓰고, 오디오도 듣고, 아기들도 만나면서 말이다. 이제 이틀후면 집으로 갈텐데 벌써 가기 싫다. 어쩌나.

어쩌긴. 아무생각없이 오디오나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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