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기

kkiihhii 2019. 11. 20. 10:15


엉성한 꽃꽂이.

하지만 꽃들을 살리기 위해 버려진 2L 플라스틱 생수통을 잘라서 꽃병을 만들었다. 어제는 출장 갔다 온 남편이 꽃다발을 2개나 받아왔다. 본디 꽃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 없는 33살 와이프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지 3년 차가 된 작은 여자아이를 위해 저 꽃을 들고 버스 안을 왔다 갔다 했을 남편.

항상 아파트 주변에 피어 있는 작은 꽃들만 봐왔는데 크고 싱그러운 꽃들이 가득 묶인 꽃다발을 본 4살 여자아이의 반응이란. 폭발적이었다. 한참을 보고 또 보더니 급기야 소파에 꽃들을 나란히 진열하고 열과 성을 다해 한 송이씩 냄새를 맡아주었다. 꿀벌도 부러워하겠구나 내 딸아.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새 뜨끈했던 방의 온도 덕분에 꽃들이 죄다 시들어있었다. 급하게 플라스틱 꽃병에 옮겨놨지만. 글쎄. 역시 꽃은 꺾는 것보다는 그대로 놔두는 편이 나은 것 같다. 싱그럽고 냄새도 좋지만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꺾어다 장식한다는 것이 슬픈 거 같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나는 오늘 아침에 베이컨과 계란을 먹었다. 아마도 눈앞에서 꺾이거나 죽는 순간을 보지 못한 채 포장 되어 내 앞에 덩그러니 왔으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거겠지. 이 모든 것들의 생산과정을 보면 아무래도 먹기 힘들겠지.

그래도 꽃은 식물이라서 그런 걸까. 베이컨과 계란보다 더 가슴을 아프게 하는 뭔ㅡ가가 있다. 당연히 베이컨과 계란이 내게 오는 과정이 더 처절하고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식물이 눈앞에서 서서히 시들어 가는 모습을 직접 본다는 건 느낌이 다르다. 유통기한이 지난 베이컨을 보고 슬퍼하기보다는 화가 나는 인간이 많지만, 아름다운 꽃은 시드는 과정에서 맥락 없이 슬프게 만든다. 먹을 수도 없고 실용성도 떨어지는 저 꽃은 아름답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침부터 나를 자연주의 글을 쓰게 만들었다.

슬퍼질 뻔. 이런 거 저런 거 갬성 프레임을 덧입혀 봤자 나는 또 이런 일은 잊어버리고, 내 딸은 또 다른 꽃다발을 보면 좋아하겠지. 아무렴.

내가 이래서 꽃다발을 안 좋아하나 봐.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 들어도 헛소리  (0) 2019.11.26
2019년 11월 18일 월요일 일기  (0) 2019.11.24
2019년 11월 13일 일기  (0) 2019.11.17
2019년 11월 11일 월요일 일기  (0) 2019.11.16
2019년 11월 8일 금요일 일기  (0) 2019.11.12
댓글